후나다 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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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나다 나카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0년에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법제국장관을 역임하고, 대정익찬회 정책국 내정부장을 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직 추방을 당했으나, 1951년 해제된 후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당,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제3차 하토야마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고, 중의원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으며,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지냈다. 그는 친 대만, 친 한국 성향의 매파 정치인이었으며, 에가와 스구루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성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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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에서 조상 대대로 신직에 종사해온 후나다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1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대학 영법과를 졸업한 뒤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도쿄시 부시장과 시장 대리를 지낸 뒤 193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1]
전전에는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1931년 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의 비서관을 지냈고,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 때 법제국장관으로 취임했다. 1940년 대정익찬회 정책국 내정부장을 역임했으며, 1945년 호국동지회를 결성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일본협동당 창당에 참여했지만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1]
1951년 공직 추방이 해제되고, 다음 해 치러진 총선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합류했다. 같은 해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았으며, 자민당 외교조사회장과 안전보장조사회장을 역임했다. 정치적으로는 친대만·친대한민국파이자 매파에 속했다.[1]
당내 파벌에서는 오노 반보쿠가 이끄는 백정회(후의 목정회)에 속해 있었는데, 오노가 사망한 뒤 후나다가 이끄는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가 이끄는 일양회로 분열되었고, 후나다는 일신회의 영수가 되었다.
제51·56대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재임 기간: 1963년 12월 7일 - 1965년 12월 20일, 1970년 1월 14일 - 1972년 11월 13일). 일본국 헌법 시행 후 세 번째로 오래 재임했다. 1977년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1][2]
아버지가 만든 학교법인 후나다교육회 이사장직을 맡았는데,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 출신 에가와 스구루의 후견인으로 에가와 사건에도 개입했다.
1979년 4월 12일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사후 2년 뒤에 자신이 후나다 나카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인지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2]
2. 1. 초기 생애 및 관료 경력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에서 조상 대대로 신직에 종사해온 후나다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1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대학 영법과를 졸업한 뒤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도쿄시 부시장과 시장 대리를 지낸 뒤 193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2. 2. 정계 입문 및 전전 활동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에서 조상 대대로 신직에 종사해온 후나다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1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대학 영법과를 졸업한 뒤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도쿄시 부시장과 시장 대리를 지낸 뒤 193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1]전전에는 입헌정우회 소속이었는데 1931년 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의 비서관을 지냈고[1],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 때 법제국장관으로 취임했다. 1940년 대정익찬회 정책국 내정부장을 역임했으며 1945년 호국동지회를 결성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일본협동당 창당에 참여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
2. 3. 전후 활동 및 공직 추방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협동당 창당에 참여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1]1951년 공직 추방이 해제되고 다음 해 치러진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합류했다. 같은 해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때 방위청 장관이 되었으며, 자민당 외교조사회장과 안전보장조사회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오노 반보쿠가 이끄는 백정회에 속해 있었는데, 오노가 죽은 뒤 후나다가 이끄는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가 이끄는 일양회로 분열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친대만·대한민국파, 매파로서의 입장을 취했다.[1]
2. 4. 정계 복귀 및 자민당 활동
1951년 공직 추방이 해제되고 다음 해 치러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2]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합류했다. 같은 해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았으며, 자민주당 외교조사회장과 안전보장조사회장을 역임했다. 정치적으로는 친대만·대한민국파이자 매파에 속했다.[2]당내에서는 오노 반보쿠가 이끄는 백정회에 속해 있었는데, 오노가 사망한 후 백정회는 후나다가 이끄는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가 이끄는 일양회로 분열되었고, 후나다는 일신회의 영수가 되었다.[2]
1977년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2]
2. 5. 파벌 활동 및 중의원 의장 역임
1951년 공직 추방이 해제되고 다음 해 치러진 총선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합류했다. 같은 해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았으며, 자민당 외교조사회장과 안전보장조사회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정치적으로는 친대만·친대한민국파이자 매파에 속했다.당내 파벌에서는 오노 반보쿠가 이끄는 백정회(후의 목정회)에 속해 있었는데, 오노가 사망한 뒤 후나다가 이끄는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가 이끄는 일양회로 분열되었고, 후나다는 일신회의 영수가 되었다.
제51·56대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재임 기간: 1963년 12월 7일 - 1965년 12월 20일, 1970년 1월 14일 - 1972년 11월 13일). 일본국 헌법 시행 후 세 번째로 오래 재임했다. 1977년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1][2]
2. 6. 자유민주당 부총재 및 사망
1977년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 1979년 4월 12일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사후 2년 뒤에 자신이 후나다 나카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인지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2]3. 정치 성향 및 평가
후나다 나카는 자민당 외교조사 회장, 안전보장조사 회장을 역임하며 친대만·대한민국파이자 매파적인 입장을 취했다.[1] 당내에서는 오노 반보쿠파에 속했다가 오노 사후 일신회(후나다파)의 영수가 되었다.
3. 1. 에가와 사건 개입 논란
1977년 자민당 부총재였던 후나다 나카는 사쿠신 학원 이사장으로서 사쿠신 학원 고등학교 출신(OB)인 에가와 스구루의 후견인으로 에가와 사건에 개입했다.[2] 그는 자신의 정치적 발언력을 배경으로 에가와를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군)에 입단시켰다.[2]4. 가족 관계
정치인 가문으로 잘 알려진 후나다 삼형제의 장남이다. 사후, 후나다 나카의 딸을 칭하는 여성으로부터 인지 소송을 당했다.[2]
5. 역대 선거 결과
6. 저서
참조
[1]
서적
日本官僚制総合事典:1868 - 2000
[2]
뉴스
毎日新聞
1981-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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